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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명절 직전 한 출판사 편집자가 소개해준 프랑스 문학가 조르주 페렉(조르주 페레크)의 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정말 사랑하지만, 길어도 너무 긴 설 연휴는 휴일엔 무조건 누워 지내야 한다는 내 굳센 신념을 무너뜨렸다. 책 몇권을 만지작거리다 페렉을 펼쳤다. 이런, 휴일에 집중과 몰입을 해버리다니.
페렉은 1974년 10월의 어느 흐린 주말, 파리 6구의 생쉴피스 광장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날씨가 변하는 것, 사람들과 자동차들과 구름이 지나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바다이야기규칙
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것”을 간결하게 기록한다. 의미를 해석하거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장소의 역사를 기술하거나 형태를 묘사하지도 않는다. 광장 근처 대성당이나 뤽상부르 공원 같은 곳엔 눈길을 주지 않는다.



19세기의 생쉴피스 광장. 쥘 아르누 석판화. 위키미디대국 주식
어 코먼스


아주 크게 보이는 한 조각의 하늘, 버스의 번호를 보려고 손으로 햇빛을 가리는 노인, 가방을 뒤적거리며 광장 구석에 쭈그려 앉은 남자, 갑자기 날아올라 광장을 선회하다 구청 건물 빗물받이 홈통으로 돌아와 앉은 새들, 오늘도 온 어제 왔던 비둘기들, 텅 빈 87번과 반쯤 찬 86번 버스. 삼성전자전망
페렉의 시야를 통과해 텍스트로 기록된 건 유명하고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지루한 묘사를 읽다 보면 일상의 장소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미시적 사건들이 영상처럼 생동한다.
노트 어딘가에 굵게 적어놓은 단어, ‘공간 문해력’이 떠올랐다. 한 유튜브 강의에서 즉흥적으로 한 말인데, 대략 이런 내주식속보
용이었다.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뭐가 왜 좋은지 물으면 대답에 등장하는 표현이 참 빈약해요. 예뻐요, 멋있어요, 아니면 외국 같아요. 쓰는 어휘가 그 정도라는 건 공간 문해력이 낮다는 뜻 아닐까요. 일상에서 좋은 공간을 구별하고 잘 경험할 줄 아는 능력, 즉 공간 문해력이 중요합니다. 좋은 공간은 평범한 일상을 풍유망주식
요롭게 합니다.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감각하는가, 그 장소가 왜 좋은가, 저 경관의 어떤 면이 아름다운가, 그런 환경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쉽지 않더라도 자주 생각해 보고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면 공간 문해력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요.”
설익은 논리로 어설프게 한 말에 뜻밖에도 많은 피드백이 왔다. 누군가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게 해주는 능력”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누군가는 정확한 의미를 묻는 메일을 보내왔다. “‘공간을 구별하고 경험하고 소통하는 소양’이라는 뜻으로 쓴 말인데, 엄격하게 정의된 학술 개념은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 문해력은 공간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공간 수용자의 능력이지만, 그런 힘은 텍스트의 독해자-공간 수용자-뿐 아니라 텍스트 자체-공간-에서도 나온다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짐작에 가까운 주장이라 묻어뒀다.
페렉의 ‘시도’를 읽고 나니 공간 문해력이라는 묵혀둔 숙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내친김에 전에 읽다 만 그의 전작 ‘공간의 종류들’을 펼쳤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빗대자면,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다. 자신의 실험을 “한 공간 사용자의 일기”라 말하며 그는 묻는다. 당신은 공간으로써만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하겠는가? “문제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도, 그렇다고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 중요한 것은 공간에 대해 질문하는 것, 혹은 좀 더 단순히 말해 공간을 읽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역사문화유산인 생쉴피스 광장. 페렉은 이 장소의 하찮고 평범한 것들만 기록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페렉은 작게는 책의 페이지부터 침대, 방, 아파트, 건물, 거리, 구역, 도시, 시골, 나라, 세계로 확장해가며 공간을 분류해 목록화하고, 공간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잤던 모든 장소의 목록을 만든다. 나의 방들, 공동 침실들과 내무반들, 친구의 방들, 친구를 위한 방들, 우연한 잠자리들(긴 의자, 카펫, 야전침대 등), 시골집들, 호텔 방들, 평상시와 다른 조건들(기차, 비행기, 자동차, 배, 경찰서, 텐트, 병원 등). 분류와 기록은 기억과 상상으로 나아간다. “중성적인 분류와 기록은 그 자체로 무수한 과거의 기억을 담고 있는 창고이자 자유로운 상상력이 펼쳐질 수 있는 출발점”(번역자 김호영)인 셈이다.
얼마나 오래 누워서 지낼 수 있는지 실험해야 마땅한 연휴지만, 비록 도시와 계절은 다르지만, 페렉의 시도를 똑같이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어느 신도시의 한 공원을 소진시키려는 시도. 집 근처 호수공원의 카페에서 사흘을 보내기. 수변 창가 자리를 차지한다. 정치 뉴스에 시간을 소비할 게 뻔해 노트북은 아예 가져가지 않았지만, 자꾸 휴대폰으로 눈과 손이 간다. 목적 없이 인스타그램을 뒤적인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내란과 탄핵 뉴스로 끊임없이 유혹한다. 비행기 모드로 바꿨지만 계속 카메라 앱을 열게 된다. 나중에 사진 보며 글을 써 보자는 심산. 두 시간을 못 버티고 첫날 시도를 접었다. 다음날은 조금 달랐다. 휴대폰을 두고 가는 용기까지 낸다. 창밖을 응시하고 관찰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는 건 몽환적인 설경뿐, 메모지에 석 줄을 채우기 어렵다. 인내력을 발휘해 장소를 읽어 보려 애쓰지만 기록의 단계로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결국 나는 공간 문해력의 열쇠를 찾아 일상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에 실패했다. 스마트폰 탓, 내란 탓을 하며 침대로 퇴각했지만, 정작 패인은 다른 데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좋고 아름다운 것, 독특하고 비범한 것을 찾으려는 나의 오랜 습관과 달리, 페렉의 초점은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하기. (…) 그로테스크하거나 쓸데없거나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주제를 고갈시키기 위해 노력하기”였던 것.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